영남알프스의 가지산(加智山)
관광도시 울산(蔚山) 여행(旅行) 정보
인구 108만이 살고 있는 울산(蔚山).
사람들이 흔히 공업도시(工業都市)
혹은 공해도시(公害都市)로 부르는 울산(蔚山)은
생각보다 역사가 깊고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다.
끝없는 수평선을 풀고 있는 동해와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가지산(迦智山을 끼고 있는 울산(蔚山)은 곳곳에 아름다운 경치를 숨기고 있는
관광도시이자 여름 휴가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예로부터 비소가 섞인 철이 많이 나와
힘이 셌던 울산(蔚山)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8경이 있다
.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울산(蔚山) 8경부터 살펴보자.
성루화각, 전함홍기, 동봉일출, 산사송풍, 강정매설, 조대소우, 염촌단염,
남포월명이 그 비경이다.
▲ 대왕암 무대왕비가 남편처럼 호국용이 되고자 이 바다에 묻혔다는 대왕암
성루화각(城樓畵角)은
세종 초기에 지은 병영성과 그 튼튼함을 감탄하는 것이며,
전함홍기(戰艦紅旗)는 왜구를 막기 위해 전함에 나부끼는 홍기를 말한다.
동봉일출(東峯日出)은 동대산 봉우리에 아침 해가 막 솟아오르는 풍경이며,
산사송풍(山寺松風)은 함월산 백양사에 올라 훈풍과 5월 송림 사이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맞는 모습이다.
강정매설(江亭梅雪)은
태화강에 제방이 없던 옛날 강정에 내린 설경을 노래한 것이며,
조대소우(釣臺疎雨)는 낚시터에 앉아 성 가시게 오는 비도 잊은 채
낚싯대만 바라보는 어옹이 지닌 여유로운 모습이다.
염촌담연(鹽村淡烟)은 봄날 아지랑이 너머 소금가마에서 피어오르는 몇 줄기 연기를,
남포월명(南浦月明)은 개운포 어느 누대에 올라
처용암과 동백섬이 보이는 달밤에 바다를 바라보면 잔잔하게 출렁이는
은빛물결이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광복 뒤에 새롭게 정한 신울산 8경은
염포귀범(鹽浦歸帆, 돛을 단 고기잡이배가 그림처럼 떠 있는 어촌풍경),
서생모설(西生暮雪, 서생포왜성에 눈 오는 풍광),
문수낙조(文殊落照, 문수산 뒤로 타는 듯 한 붉은 노을이 일렁이는 해질녘 광경),
삼산낙안(三山落雁, 태화강 하류 삼산평야를 따라
기러기가 떼를 지어 앉은 고즈넉한 운치)이다.
그 다음으로 태화어간(太和魚竿, 용금소에 낚시를 던져놓고
세월을 낚던 태공들과 그 뒤로 우뚝 솟은 바위를 등지고 흐르는 태화강 푸른 정취),
무룡산조(舞龍山朝, 동쪽 무룡산 기슭을 따라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 일출),
학성세우(鶴城細雨, 새싹이 움터 나오는 학성공원에 봄을 알리는 가는 비가 흩날리는 풍광),
백양효종(白楊曉鐘, 고요한 밤 적막을 깨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백양사 새벽 종소리)이다.
동녘은 동해, 서녘은 경북 청도군, 밀양시, 양산시,
남녘은 부산 기장군, 북녘은 경북 경주시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울산광역시.
울산은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한 굴아화촌(掘阿火村)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 중심지였다.
고려 태조 때에는 흥례부로 승격되었다가 공화현으로 떨어졌으며,
1018년(현종 9) 울주로 이름이 바뀌어 방어사를 두었다가
1397년(태조 6)에 진을 두고 병마사가 지주사를 함께 맡았다.
울산(蔚山)이란 이름은 1413년부터 불리워졌고,
1599년(선조 32) 도호부로 승격한 뒤, 1895년(고종 32) 도호부가 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 부·군을 정리 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 때 언양군을 울산군에 합쳤다.
1931년에는 울산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34년 동·면을 읍으로 올려 방어진 읍으로 승격했다.
1962년 울산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시·군이 분리되었고,
1991년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바뀌었다.
1995년 1월에는 울산시와 울산군이 합쳐
도농복합형 통합시가 되면서 울산군 모두 울주군으로 바뀌었다.
1997년 7월 15일자로 울산광역시로 승격했으며,
2001년 현재 중구·남구·북구·동구·울주군은 4구 1군 체제로
4읍 8면 46개 동이 있는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다.
재정자립도는 87.2%이며 연평균기온은 13.8℃,
연평균강수량은 1274.6mm이다.
▲ 반구대 암각화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
울산(蔚山)을 제대로 둘러보는 길은 크게 2가지다.
첫째는 산과 바위,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는 천전리각석,
반구대 암각화, 석남사, 가지산, 언양불고기 등 5곳이다.
둘째는 동해안을 끼고 옹기종기 앉아 있거나
사지를 쫘악 펴고 드러누워 있는 기기묘묘한 바위와 몽돌밭,
해수욕장이 있는 간절곶, 처용암, 일산해수욕장, 울기등대, 대왕암,
정자해변 등 6곳이다.
국보 제147호로 지정된 울주 천전리 각석은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허리춤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윗단에는 쪼아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부 해를 상징하는 듯 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사슴 네 마리가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다.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과 글자 800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왕과 왕비가 이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 때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짐작된다.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는
높이 3m, 너비 10m로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지금은 물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모두 75종 200여 점에 이르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 모습 등이며,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이다.
석남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석남산(石南山)이라고도 불리는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비구니 절이다.
이 절은 824년(헌덕왕 16년)에 도의국사(道義國師)가 호국기도를 위해 창건했으며,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다시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도의국사 사리탑인
석남사 부도(石南寺浮屠, 보물 369)가 있으며,
821년에 도의국사가 세운 석남사 3층 석탑(울산유형문화재 22)이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및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을 끼고 있는 산이 가지산(1241m)이다.
곁에 있는 영취산과 천성산(812m) 등과 함께
1979년 11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은 주변에 있는 운문산(1188m),
천황산(1189m), 고헌산(1034m) 등과 더불어 태백산맥 남쪽 끝 산악지대를 만들고 있다.
신불산(1159m), 간월산(1069m), 영축산(일명 취서산 1081m)과 함께
'영남의 알프스'로 불리며 이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에는 바위 능선이 많고 나무가 거의 없고
사방이 탁 트여 가을이면 곳곳이 억새밭으로 출렁인다.
높이 약 40m에 이르는 쌀 바위도 인기다.
○언양불고기
▲ 언양불고기 쇠고기를 얇게 썰은 뒤 양념을 버무려 만든
언양지역에 있는 향토음식이다.
언양불고기는 쇠고기를 얇게 썰은 뒤
양념을 버무려 만든 언양지역에 있는 향토음식이다.
이 불고기가 유명해진 것은 1960년대부터.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도축장과 푸줏간이 있었는데,
1960년대 이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모여들었던 노동자들이
이곳 고기 맛을 보면서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언양불고기 특징은 한두 마리 새끼를 낳은 암소를
도축한 지 24시간 안에 조리한다는 것.
여기에 양념맛 때문에 고기 맛이 가려진다는 이유로
주로 생고기나 소금구이로 내놓고 있다.
끝으로 일정한 온도를 지키면서 일산화탄소 발생을 막기 위해
백탄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간절곶
동경 129도 21분 50초, 북위 35도 21분 20초에 위치한 간절곶은
새천년 밀레니엄의 첫 해돋이 (2000년 1월 1일 오전 7시 31분 17초)로
유명한 곳이다.
먼 바다에서 바라보면 뾰족하고
긴 간짓대(대나무장대)처럼 보여 이름 붙여진 간절곶은
포항의 호미곶 보다 1분, 강릉의 정동진보다는 5분 앞서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새천년 기념비와 함께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진하해수욕장, 서생포 왜성이 있어 평소에도 부산, 경주 등
인근지역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간절곶 등대
간절곶은 유라시아(아시아, 유럽) 대륙에서 해가 제일 일찍 뜬다는 곳이다.
간절(艮絶)이란 이름은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간 어부들이
동북쪽이나 서남쪽에서 이 곶을 바라보면
긴 간짓대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곶(串)은 육지가 뾰족하게 바다 속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신라 때부터 고차(古次) 혹은 곶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박제상 부인과 두 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출어한 어부의 무사귀향을 비는 간절한 소망과 함께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도 새천년의 소원들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을주군민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 처용암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668~1에 자리 잡고 있는 처용암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668~1에 자리 잡고 있는 처용암.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이 섬은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놀이를 와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운무가 심해 앞을 볼 수 없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바다용의 조화이니 절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왕이 곧 명을 내려 용을 위한 절(망해사)을 세우게 하라고 하자
운무는 씻은 듯이 걷히고 해가 떠올랐다.
이 지역을 개운포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해 용왕이 이때 크게 기뻐하여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바다 위로 올라와 춤을 추었는데
그 아들 가운데 하나가 처용이다.
처용암은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이 바위를 말한다.
▲ 울기등대 야트막한 산이 면적이 무려 28만 평이나 된다는 울기공원
○일산해수욕장
울산(蔚山)에서 방어진으로 가는 길을 따라
한동안 달리다 보면 송림이 우거진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이는 곳이 일산해수욕장이다.
그 해수욕장 오른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면적이 무려 28만 평이나 된다는 울기공원이다.
이 울기공원 안에는 울기등대를 비롯한 고래요골, 대왕암, 용굴,
남근바위, 탕건바위, 자살바위, 처녀봉 등이
오늘도 동해의 검푸른 물을 촐싹이며 세수를 하고 있다.
▲일산해수욕장 전경
울산(蔚山) 동구 일산동 산 907번지에 있는 울기공원은
문무대왕비가 남편처럼 호국룡이 되고자 이 바다에 묻혔다는 대왕암이 있어,
대왕암 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대왕암 입구에 고래 턱뼈를 세워놓아
예로부터 고래의 고장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대왕암에는 현대에서 놓았다는 철교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고,
이 철교가 끝나는 자리에 서 있는 붉으스럼한 바위가 대왕암이다.
그밖에도 남근바위, 처녀봉, 천연동굴 용굴, 자살바위,
탕건바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 '정자해변'
울산(蔚山) 주전에서 감포로 이어지는
경남북 동해안 31번 국도변에 자리한 정자해변.
이 해변은 바닷물이 수정 같이 맑기로 소문났으며 몽돌이 예쁘게 깔려 있다.
먹을거리도 많다.
막 잡아 올린 싱싱한 횟감도 그만이지만
무엇보다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주전마을 멸치회다.
이 멸치 젓갈은 기장 대변 멸치 젓갈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 해변에서 또 하나 볼거리는 일출이다.
그밖에 장생포 고래 고기, 태화강 선바위,
태화강 십리대밭 등도 놓치지 말자.
▲정자해변과 조약돌
○영남알프스의 주봉(主奉) 가지산(加智山)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및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경계에 있는 산.
높이는 1,240m이다.
태백산맥의 끝자락에 딸린 산이다.
주위의 운문산(1,190m)·천황산(1,189m)·고헌산(l,033m) 등과 더불어
태백산맥의 남쪽 끝 산악지대를 형성한다.
위의 산 외에 신불산(1,209m)·간월산(1,083m)·영취산(일명 취서산:1,059m)과 함께
영남의 알프스로 불리며, 이들 가운데 가장 높다.
밀양강의 지류인 산내천(山內川)·무적천(舞笛川)의 발원지이며,
남쪽의 천황산 사이 산내천 하곡부(河谷部)의 산내면 시례(詩禮)에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이 있다.
정상 부근에는 바위 능선이 많고 나무가 거의 없는 대신
사방이 탁 트여 가을이면 곳곳이 억새밭으로 장관을 이룬다.
높이 약 40m의 쌀 바위도 유명하다.
동쪽 상북면 계곡에는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자 비구니 도량인 석남사(石南寺)가 있다.
이곳에 절의 창건자인 도의국사(道義國師) 사리탑인
석남사부도(보물 369)와 석남사삼층석탑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22)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인근의 영취산·천성산(812m) 등과 함께 1979년 11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동쪽 산기슭에는 신라 헌덕왕 16년에
도의국사가 창건했다는 석남사가 자리 잡고 있다.
보물 369호 도의국사의 부도와 3층 대석탑 등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가지산(加智山)은 1979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전국의 도립 공원 중 그 범위가 가장 넓은 곳으로
석남사 지구와 양산 지구로 나눈다.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가지산,신불산,취서산,간월산,천황산,운문산,고현산으로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 우는 곳이다.
이중 가장 높은 곳이 가지산(加智山)이다.
가지산 정상 주위엔 나무가 별로 없고
곳곳에 바위와 억새가 잘 어우러진 산이다. 』
영남칠산이라 불리는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가지산(加智山)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의 경계에 있으며,
서남쪽으로 1,189m의 천황산과 이웃해서 태백산맥과 나란히 남단으로 매듭져 있다.
▲망원석(望遠石)
가지산(迦智山)
높이는 해발 1,240m나 되는 웅장한 산입니다.
영남알프스 주봉(主奉) 가지산을 아시나요.
동해의 햇살 받아 장엄한 일출 향연이 펼쳐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철 따라 변하는 그런 산
유서 깊은 석남사 부처님 알현하고, 조물주 의 창조로
호박소를 만들고, 학소대를 빚었으니
용(龍)이 승천한 용수골, 노승이 길을 잃은 심심이골
형제소의 애틋함이 쇠점골로 이어질 때
선녀폭포, 오천평반석 달그림자 드리울 때면
구연교 이목도사 큰절하고 돌아보니
가지산 주봉에서 뻗어 나온 지맥(地脈)들이
신비한 봉우리를 만드니 신불산, 간월산, 영취산이 그것이요.
석남천 맑은 물 또한 그 것이로다.
석남재 짧은암릉 아쉬움을 달래려고
입석대(立石臺) 높은 벽 에 그 뜻을 새기려다
새벽 닭 울음소리에 발길을 돌렸는데
얼음골 청룡대에 동녘 햇살비출 때면
산 사나들의 잡담소리 구수하게 들려오고
바람 부는 능동산 에서 가지산을 바라본다.
-모셔온 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울산의 울타리가 되는 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울산시민들의 식수를 공급하는 젖줄인
태화강의 시작점이 되는 발원지입니다.
동해안을 끼고 남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여맥은
영남 땅에서 힘껏 솟구쳐서 10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형성한다.
이 일대를 `영남의 알프스'라고 부른다.
○가지산(迦智山)지명유래
가지산(迦智山)은 본래 까치 산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으로
가(迦)는 까 의음을 빌린 것이며 지(智)도 치의 음차(音叉)로
까치의 옛말은 “가치”이고 가지산은 옛‘가치에’의 이두로 된 이름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迦智山, 加智山, 伽智山으로 된 설과 함께
까치가 등장하는 설이 있다.
가지산(迦智山)의 또 다른 이름은 구름재. 울주군 상북면 사람들은
구름 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자주 구름에 뒤덮이는데서 유래하였다.
또 천화산(天火山) 이라고 부르는데
그 연유는 이 산이 화산의 분화구 지대임을 말해주는 듯싶다.
그리고 밀양 쪽에서는 실혜산(實惠山) 이라고 부르는데
산속에 실혜촌 또는 부요(富饒)마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실혜촌은 한일합방 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가지산(迦智山) 동쪽 산기슭에는
신라 헌덕왕 16년(884년)에
도의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석남사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여승들만 수도하고 있으며, 도의국사의 부도(보물 369호)와
3층 대석탑 등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쌀바위전설
언양읍지(彦陽邑誌)에 따르면
쌀 바위의 이름을 의역음사(意譯音寫)하여 시암(矢岩)이라 하였으니
그 어원은 쌀바위(白岩)로 여겨진다.
김영수의 "지리산 성모에 취하여"에 따르면 "살뫼"는 "히할뫼"라는 말로서
제일 먼저 태양의 광선을 받아서 하애지는 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벽의 일기가 하애진다는 것은 "날이 샌다"고 하고
노인의 머리가 히어지는 것을 "머리가 샌다"고 하는 변함과 같이
이 "할" 이라는 말은 다시 "살"로 발음하게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 산아래 "살티" 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살티도 "히할" 이 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북면의 가지산(迦智山)정상에는 쌀 바위(米岩)라 하는 큰 바위가 있다.
이 쌀 바위로서
언양현(彦陽縣)과 청도군(淸道郡)의 경계를 삼아오기도 하였다.
언양읍지(彦陽邑誌)에 실려 있는 '米岩'에 대한 전설을 옮겨본다.
쌀 바위에 얽힌 언양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옛날의 일이었다.
수도승 한 분이 쌀 바위 밑에 조그마한 암자를 얽어매고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며칠마다 한 번씩 마을로 내려가서는
탁발(동냥)을 하여 오는 고행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고행하는 수도승을 가엾게 여긴 것인지 기적이 일어났다.
중이 염불을 외우다 바위틈을 문득 쳐다보니 쌀이 소복히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날부터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의 쌀이
매일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흐르듯 또닥또닥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중은 마을로 내려가서 사립문마다 요령(搖鈴)을 흔들고
목탁을 치며 동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중의 머리에 문득 한 묘안(?)이 떠올랐다.
쌀이 저렇게 답답하게 조금씩 떨어지다니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하여
중은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더 크게 내면 많은 쌀이 나오겠지 싶은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되면 손들이 찾아들어도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동냥은 하지 않아도 될 터이지 하면서
하루는 중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쇠꼬챙이를 넣어 구멍을 크게 뚫었다.
이제는 쌀도 많이 나올 테고 여기에 더 큰 암자를 지어
번창할 수 있겠지하며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그 후로 쌀은 간곳없고 물만 똑똑 흘렀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사람들은 그 바위를 쌀 바위(米岩)라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는 사람은 제 분수를 지켜야 된다는 것을 경계한 이야기이다.
임도 삼거리에서 임도를 버리고 정맥 마루금을 따르니
이내 쌀 바위로 향하는 임도와 만난다.
'米岩'은 멀리서 보면 여느 산 암장(巖嶂)과 별 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기암이라기보다는 뫼산(山)자를 닮은 형상을 하고 있다.
쌀 바위에 다가 설수록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쌀 바위 아래에는 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간이매점이 자리하고 있다.
스님은 그때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통곡했으나 허사였다.
그 후로 쌀은 영영 나오지 않았으며, 이름만이 쌀 바위 즉 미암(米岩)으로 전해온다
." 이에 스님이 "내가 욕심이 나서 섣불리 한 짓이
도리어 화를 자초했다"는 생각으로 바위 위에 올라가 돌이 됐다는 설과
어디론가 행방불명됐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단지 설에 불과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스님이 쌀을 받았다는 곳에 가 보면
바위틈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어 산행객들 사이에는
능선에 물이 있는 유일한 곳으로 목을 축여가고 있다.
○귀바위(耳岩)
귀바이(耳岩)을 기점으로 남서쪽 운문산(雲門山)을 향해
힘차게 뻣어나가던 정맥 마루금이 가지산(加智山) 이란 큰 암초를 만나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석남고개까지 이어지는 능선 초입에는
1,168.8m봉이 위 사진에서처럼 우뚝 솟아 있다.
1,168.8m봉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능선에는 주변 풍광을 조망 할 수 있는
전망바위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석간수(石間水)가 시원하게 흐르는 샘터 앞에는
해맞이 기념비와 쌀 바위(米岩)의 전설이 씌어져 있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가지산(迦智山) 북능과 학심이골과 심심이골
가지산(迦智山) 북능은 가지산(迦智山)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사리암까지 길게 뻗은 능선을 말하며 능선 중앙에
거대한 암봉인 귀바위가 있다.
♣학심이골은
1)학이 노닐던 깊은 계곡이라 학심이골이라 하며
2)학심이골의 학소대 제1폭, 제2폭 상단부의 깊은 골짜기를 심이골로 부르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있다.
♣심심이골은
1)어느 스님이 잡목 덥힌 숲 터널이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심심이계곡이라 불렸다는 유래와
2)옛날 골이 깊어 청도에서 밀양으로 걸어서 넘어 올 때
혼자 걸으면 무섭고 적적하고 심심하다 하여 "심심이골" 불러지게 되었다는 것이 있다.
학심이골에는 학소대 폭포와 배바위,
수많은 소와 폭포가 있으며 영남 알프스의 천개의 봉우리와
만개의 계곡의 비경 으뜸의 계곡이 학심이골일 것이다.
가지산(迦智山) 북능을 중앙에 두고 우측에 학심이골과
좌측으로 운문산 아래 아랫재에서 시작하는 심심이 계곡으로 나뉜다.
억새로 온 산을 뒤덮고 있는 독특한 산세를 가진
`영남알프스'는 취서산(1092m,일명 영취산), 신불산(1209m), 천황산(1189m),
운문산(1188m), 고헌산(1033), 문복산(1013m)과 가지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지산은 이 많은 봉우리 중에서 최고봉이다.
주변의 귀바위(1,117m) 무명봉인 1042봉, 1028봉, 1060봉등이
가지산을 빙 둘러 대장처럼 호위하고 있다.
특히 쌀 바위에서
산 위를 잇는 능선 일대가 바위벽과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갖 형태의 바위, 석남사, 얼음골, 폭포들이 어울려
영남에서 으뜸가는 산으로 꼽히고 있다.
가지산(加智山)에는 곳곳에 바위봉과
억새밭이 어우러져 운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능선을 따라 갈 수 있다.
가을이면 석남고개에서 정상에 이르는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고,
기암괴석과 쌀 바위는 등산객의 눈길을 이끈다.
고속도로를 따라 언양 근처를 지나다 보면 서북 편으로 세모꼴의
가지산(加智山) 머리가 보이지만 주위에 높은 산이 많기 때문에
평지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산이다.
가지산(加智山)은 거의 1000미터 높이를 지키며
뻗어 있는 산줄기 위에 솟아 있기 때문에 가지산 하나만으로는
그리 장한 맛이 없고 무던하게 보이지만
북서쪽과 남동쪽 그리고 남쪽은 사람이 발붙이기가 어려우리.
만치 가파른 비탈로 되어 있다.
장엄한 주능선과 험악한 산봉우리,
골짜기는 쳐다보기만 해도 겁이 나지만,
가지산(加智山) 산행의 또 다른 묘미는 이야기를 간직한 크고
묘한 바위봉우리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베틀 같은 베틀바위, 딴청을 부리고 있는 딴바위,
끼니마다 한 사람이 먹을 만큼 나오던 쌀이
욕심쟁이의 욕심 때문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의 쌀 바위 등이
산행 길을 심심치 않게 한다.
규모는 작지만 땅 위에 꽉 차게 자리 잡은 모양과 균형미,
그리고 장렬함은 거대한 유럽의 알프스에 뒤지지 않을 형국이다.
이곳은 사계절 자연경관의 변화가 뚜렷하며,
가지산 정상으로 가기 전의 쌀 바위는 전국의 암벽등산객들의
암벽등산 코스로 유명한 곳입니다.
운문 재에서 귀바위, 쌀 바위를 지나 상봉으로 이어지는 줄기가
수려하고 석남 골과 청수 골을 안고 있습니다.
가지산(加智山)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석남사로 내려오면
작은 폭포들이 줄지어 있는데 이것들이 앞서 말한 태화강의 발원지입니다.
가지산의 지질은 경상계 안산암질 안과 이를 관입한 화강암이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가지산 남쪽 사면과 능동산 북서쪽 사면이 속해 있는 밀양시(密陽市)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양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던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신라 때에는 추화군(推火郡:밀벌 또는 미리벌의 한자 표기)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치고
밀진현(密津縣)·상약현(尙藥縣)·오악현(烏嶽縣:
또는 烏兵縣)·형산현(荊山縣)·소산현(蘇山縣)을 영현(領縣)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에 들어 995년(성종 14)에 밀주(密州)로 개칭했다.
고려 초에 오악현·형산현·소산현은 청도군으로 이관되었다.
1018년(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이 되어 창녕군·청도군과
현풍현·계성현(桂城縣)·영산현(靈山縣)·풍각현(豊角縣)을
속군현으로 포함했다.
1275년(충렬왕)에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鷄林府:경주)에 병합되었다.
후에 현으로, 128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곧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5년(태종 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
1518~22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별호는 응천(凝川)·밀산(密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밀양군,
1896년에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8년에 군의 중심지인 부내면 이 밀양 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밀양 읍으로, 1989년에 밀양시로 승격되어 밀양시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밀양시와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했던 밀양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밀양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으로 나누어지는데
해발 600m까지는 노박덩굴, 상수리, 참싸리 등이 자라며
중간지역에는 굴참나무, 당마가목 등이 있고, 정상부근에는 참오리나무,
국수나무, 정향나무 등이 자라고 있습니다.
또한, 가지산에는 10월 초 3일간 민속축제행사로
"처용 문화제"가 열리며, 이곳에는 흑염소, 맥문동, 단감, 누에고치, 오골계,
가지산 송엽주 등이 유명합니다.
○석남사(石南寺)
석남사(石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24년(헌덕왕 16)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禪)을 도입한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했다.
1716년(숙종 42) 추연(秋演)이 쓴 사적기에 의하면 화관보탑(華觀寶塔)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74년(현종 15) 언양현감 강옹(姜翁)이
사재를 내어 탁령(卓靈)·자운(慈雲)·의철(義哲)·태주(泰珠) 등에게 중창하도록 했다.
그 뒤를 이어 정우(淨佑)·각일(覺日)·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靑風堂)·청운당(靑雲堂)·청화당(靑華堂)·향각(香閣)을 중축하고,
희철(熙哲)이 명부전을 신축했다.
1803년(순조 3)에는 침허(枕虛)외 수일(守一)이,
1912년에는 우운(友雲)이 중수했다.
6·25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1957년에
비구니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중건했는데,
이때부터 비구니의 수도처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설선당·조사전·심검당·침계루(枕溪樓)·
정애루(正愛樓)·종루·무진료(無盡寮)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도의선사의 사리탑으로 전하는 부도(보물 제369호)가 있고
, 이밖에 3층 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과 부도 4기 등이 있다.
석남사는 불자들에게는
국내외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울산사람들에게는 늘 열려있는 휴식처로서
늘 푸르른 산림과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제공하며
한겨울에는 가지산의 설경과 어울려 가람을 하얗게 덮은 눈은
우리들에게 절경을 보여줍니다.
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加智山) 혹은 석안산(石眼山)이라고 하는
산의 남쪽에 있다하여 석남사(石南寺)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신라 헌덕왕 16년(824년) 도의국사의 창건이래.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후 1674년 조선 현종 15년 탁영(卓靈), 선철(善哲)선사(禪師)등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다시 1803년 순조 3년에 침허(枕虛) 수일(守一)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1912년 우운(友雲)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며
1957년 비구니(比丘尼) 인홍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하신 이래
각 당우를 일신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건물 동수가 모두 30여동이며, 대한 불교조계종 산하 80여개의 선원 중
문경 봉암사와 더불어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석남사(石南寺)란 이름은 가지산(迦智山)을
석면산(石眼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종선 시조는 도의(道義) 선사다.
도의는 37년 동안의 중국에서 수행정진 끝에 금의환향하였지만
고국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가지산으로 내려와 창건한 선찰이 석남사다.
이곳은 비구니들의 수도처로서 많은 비구니들이 정진하고 있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 아래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세운 것이며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1973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다.
절 경내에는 울주 석남사 승탑(보물 제369호),
3층 석가사리탑, 3층 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5호),
석남사 수조(문화재자료 제4호)등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강선당(講禪堂) ·
조사전(祖師殿) · 심검당(尋劍堂) 등 30여 동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791년(정조 15년)에 세운 극락전이 있으며
다음 가는 건축물로는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도의국사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의 엄나무구유 · 돌구유 등이 있습니다.
헌덕왕(신라제41대憲德王 서기809-826)에
한국에 최초로 선을 도입한 도의국사 (道義國師)가
일찍이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 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해 창건하셨습니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하여
최초로 선문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시조가 되었으나
고국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3년 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창건이후 여러 차례 중건중수(重建重修)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후 1674년 (현종 15년)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영(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 태주 (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성진(性眞)이 단청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香閣)을 증축 하였고,
희철(熙哲)선사가 명부전을 세웠습니다.
1803년(순조 3년)에 침허(枕虛), 수일(守一)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가
1912년 우운(友雲)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
나 한국 전란으로 폐허가 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고찰의 모습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폐허가 된 것을
1957년 비구니(比丘尼) 인홍 (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시설을 중수중창을 하고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검당 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크게 각 당우를 일신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비구니들의 수도처로서 많은 비구니들의 정진하는 곳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입니다.
○유 래
가지산(加智山)은 언양현지(彦陽縣誌)에 따르면
"석남산은 현에서 서쪽으로 27리 지점에 있으며 일명 가지산이라 불린다."라고 하여
이 산의 이름이 석남산, 가지산 두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이중 석남산은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석남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며 석남산과 비슷한 석안산(石眼山)으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가지산은 본래 까치 산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으로 가(迦)는
까의 음을 빌린 것이며,
지(智)도 치의 음을 빌린 것으로 까치의 옛말은 "가치"이고 가지산은
옛 "가치메"의 이두로 된 이름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迦智山, 加智山, 伽智山으로 된 설과 함께
까치가 등장하는 설이 있습니다.
밀양지방에서는 실혜산(實惠山)이라고 부르는데
산속에 실혜촌 또는 부요(富饒)마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혜촌은 한일합방 이후 없어졌다고 합니다.
○능동산(陵洞山)
영남알프스의 가장 중요한 산맥의 요충지
능동산(陵洞山 983m)은 영남알프스 산군중의 하나이지만
가지산과 천황산, 재약산의 유명세에 가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석남 재에서 천황산으로 뻗은 산줄기 중간에 우뚝 솟아 있어
영남알프스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지만
언양에서 얼음골로 넘어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매우 깊숙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동부 경남의 중심에 위치한 능동 산은
북으로는 가지산과 문복산이 위치하고, 북서쪽으로는 운문산과
억산 과 고구만 산이, 북동쪽으로는 고헌산 이 호위하듯 둘러서고
남으로는 간월산과 신불산 그리고 취서산이 장쾌하게 연결된다.
능동 산은 가지산에서 낙동정맥의 맥을 이어 받아 간월산, 신불산, 취서산 등을 거쳐
남으로 그 맥을 이어주는 중요한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태화강
길이 46.02km, 유역면적 643.96㎢이다.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上北面)의
가지산(迦智山:1,240m)·고헌산(高獻山:1,033m) 등에서 발원하는
남천(南川)을 본류로 하여 동쪽으로 흐른다.
물길은 다시 언양·범서·울산 등지를 지나 울산만(灣)에서 동해로 빠져나간다.
상류로부터 신화천(新華川)·
대암천(大岩川)·사연천(泗淵川)·동천(東川) 등의 지류와 만난다.
특히 상류 유역 가지산 일대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밖에도 문화유적이 산재한다.
태화강의 본·지류는 울산시의 농업 용수원과 울산공업지역의
공업 용수원으로서 큰 구실을 한다.
○파래소 폭포
가지산(加智山) 아래 석남사 앞에서 남쪽으로 나아가 덕현재에 다다르고
여기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배냇골이 누벼진다.
배내의 서쪽은 천황산이 높고 동편으로는 간월산과
신불산의 영봉들이 솟아 배내협곡은 그야말로 심산유곡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예전만 하여도 태산을 넘는 듯 길이 멀고 험하여
인적이라고는 드문 비경에 잠겨 있었던 곳이었다 한다.
간월산과 신불산의 자락이
서쪽 배냇골로 급히 떨어지는 한 곳에 백운동이 있다.
동이란 산천이 돌리고 경치가 좋다는 동천일 것이고
백운은 폭포를 비유하였을 것인데 이곳이 파래소 폭포란 곳이다.
폭포를 이루는 주위 계곡에는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의 더위를 식혀주며
특히 삼림욕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등산객들의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다.
흰 물줄기가 못으로 흘러 다시 흐르면
배내천인데 이 배내천은 낙동강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낙동강의 꺽두기가 이 배내천까지 오른다고들 하였다.
○간월사지
이곳은 옛 간월사의 터이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 (재위 647년~654년)때에 자장율사가 처음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폐사되었고,
그 후 1634년(조선 인조 12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현재 금당지 등의 건물터와 축대, 주초석, 장대석 등이 남아 있다.
1984년의 발굴조사로 금당지는
가로 13.72m, 세로 10.72m 크기의 사각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임이 확인되었다.
근처에서 청동여래입상, 청동보살입상, 기와조각, 질그릇조각 등도 출토되었다.
보물 제 370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과 두 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말기 불교미술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위치는 언양에서 7.5km 지점. 작천정을 지나 등억온천지구 위에 간월마을.
○가지산(加智山)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로 이용은 서울산분기점에서,
국도35번 이용(부산·대구·마산·경주방면)은
언양에서 24번 국도를 11km를 달리면
석남사(주차장)에 도착하며,
밀양·창녕방면은 석남터널 지나
석남사에 도착,
울산은 수시로 다니는 시내버스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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