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홀/살짝 펼친 일기장

《논픽션》… 우즈벡 7일 기행 <하>

vincent7 2012. 5. 22. 15:17

 

 

1998년 11월 27일~12월 4일 : 국제신문 연재

 

《논픽션》… 우즈벡 7일 기행 <하> / 주대봉

넷째날, 오늘은 타쉬켄트에 있는 대한무역 투자진흥공사와 한국인 회사를 찾아조언을 듣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왈레리 아저씨집에서 했다. 낮에 본 아저씨댁은 어릴 적 우리 집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넓은 정원에는 고추와 포도가자라고 있었고 봉숭아 나팔꽃 사르비아가 질서없이 피어 있었다. 긴 식사를 마친 뒤 타쉬켄트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찾았다. 대사관은 우리가 본 건물 중에서 가장 깔끔하게 잘 지은 건물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대사는 현지 한국인 생활정보지에 실린 이모, 이모부의 봉사활동 소식을 읽었다며 두 분을 무척 반기셨다. 두 분은 까레이스키들에게 한국어 강의도 하고 계신 참이었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무역관 직원은 우리와의 약속을 잊고 있었다. 약속을 상기시켜도 겨우 기억해내는 듯 하다가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한다. 우리는 불쾌함을 겨우 감추고 대사관을 나섰다.

"지금은 수출이 나라를 살릴 땐데...." "우리나라 사람끼리 이리 손발이 안 맞아서야 원...." 푸념섞인 한 마디씩을 뱉으며 한국인 회사로 향했다.

처음 만난 김사장은 평소 이모부에 대한 호감으로 인해 허심탄회한 조언을 해주셨다. 6년 동안의 현지 사업 중에 있었던 고충들을 처음 털어놓는 것이라고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역시 소설같은 역경의 삶을 지내왔다.

이야기 중 한국 사람들은 해외에서 사업을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싸움을 한다며흥분하는 모습이 가장 안타까웠다. 여러 가지 현지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도어려움 없이 좋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냐면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자리에서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잘 되었으면하는 바람뿐이었다.

모두들 고마운 마음에 김사장에게 식사를 대접하고자 한 한국인 식당으로 갔다. 타쉬켄트엔 한국음식점이 열 군데 가량 있다. 그 중에는 북한 사람이 경영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이모는 들어서자마자 집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아직 안 왔나보네." "안녕하세요. 요즘은 통 연결이 안돼요. 어쩌죠." 이모는 그 식당에서 된장, 고추장을 얻어가시곤 하셨나 보다. 그런데요즘 한국내 경기가 좋지않아 식품을 컨테이너로 들여오기가 어렵다는 주인의설명이다. 우리가 못 사니깐 이 먼 곳에 고추장 얻기도 힘들어지는구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어휴, 빨리 다시 잘 살아야지." "그래, 다시 잘 살아서 고추장 좀 실컷 얻어보자." 이모와 나는 새마을 노래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섯째날, 오늘은 현지 우즈벡 회사를 찾아가는 날이다. 승규와 나는 준비한모든 서류를 챙겨 나섰다. 공장은 허술해 보였다. 하지만 그 나라에선 그나마제법 큰 공장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회사라고 했다. 왈레리 아저씨의 통역으로우리는 제법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공장을 둘러본 뒤 발전적인 얘기도 나누었다. 먼 곳까지 온 목적을 이룬 뿌듯한 마음 위에, 머리는 사업구상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한국 상품에 대한 선호도는 현지인들 사이에 상당히 높았다. 한국은 그 나라 교역대상국 2위로 올라서 있었다. 하지만 돈없는 나라에서얼마나 더 사줄 수 있을까....회사를 나설 즈음에 갑자기 이모부에게로 연락이왔다. 허리병 환자가 통증이 심하니 꼭 와달라는 전갈이었다. 우리는 다 함께그 집으로 향했다. 우즈벡은 의료시설이 무척 취약한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이모부에게 기대고 있는 환자만 해도 무척 많았다.

그 집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께서 몸을 가누질 못하고 계셨다. 이모부는 오랜 시간 침과 부황을 놓으시고 약처방을 해 주셨다. 치료하는 동안 아들 아홉과 딸하나인 그 집 식구들은 손주까지 십수 명이 몰려와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우즈벡은 우리 나라와 닮은 것이 많았다. 기후도 비슷하지만 노인을 공경하는 모습은 다른 나라와는 찾아볼 수 없는 공통점인 듯 했다. 치료가 끝난 뒤거동이 좋아지시자 모두 기뻐하며 후한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우리 나라도 어렵지만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또 다른 기쁨의 자리였다.

여섯째날. 오늘은 유통업체 쪽으로 백화점 등을 둘러보기로 했다. 백화점은 허술한 상품 배열 속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줄이은 버스행렬이 보였다.

목화 따러 가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러시아 전체의 80%을 생산해 내는 목화,그래서 이 곳은 목화따는 시기인 9월에서 11월까지는 학생들까지 전 국민이 이불을 챙겨 집을 떠나 합숙하면서 목화를 딴다고 한다. 백화점에서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버스행렬에서는 사회주의의 병폐를 보는 것 같았다.

오늘 저녁 식사는 유가이씨 댁으로 초대받았다. 여유있게 먹는 식사에 우리도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하다. 유가이씨는 고려인으로 작년에 한국에서 두 달 일하고 온 분이었다. 그 분의 동생도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우리 사는 모습이 궁하지비?" 초대는 했지만 초라한 살림살이가 부끄럽다는말이었다.

"아이고,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여유있고, 대가족으로 모여 사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 분은 한국말에 서툴러 `대가족'이란 말은 이해못했지만 `좋다'는 말에 웃음을 띄워 보였다. 유가이씨와 동생은 한국에서 막노동을 했었다. 그런데 그와 부인은 모스코바 대학 출신이었다. 딸도 타쉬켄트 대학 한국어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 밥을 너무 급하게 먹지비." 그는 한국에서 일할 때 금방 먹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술, 아 한국 사람들 너무너무 많이 먹세. 밝을 때까지 먹지." 그가 한국에서더욱 놀랐던 것은 오늘만 살고 그만둘 것처럼 마시는 술자리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악착같이 살아야 제대로 살 수 있어요. 그러니 밥 먹을 시간도 적고 스트레스 때문에 술도 많이 마시지요." 이모부의 변론에 그도 고개를 끄덕인다. 잘 사는 것은 부럽지만 한편으론 측은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도 한국의 어려운 모습을 보고온지라 한국이 힘있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우리 일도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분 동생이 한국에서월급을 제대로 못받고 돌아왔다는 이모의 설명에 나는 왠지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우리는 모두 독립투사인양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건배를 했다.

일곱째날. 마지막 날인 오늘은 나에게 특별했다. 국어강사였던 나는 이모와 이모부가 세우신 고려문화원에서 한국어 특강을 하기로 했다. 고려문화원은 소박한 정원이 있는 가정집 모습 그대로였다. 넓은 거실 같은 교실 마루판에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애들부터 60대 할머니들까지 스물댓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35인치 텔레비전만한 칠판, 나는 언뜻 심훈의 `상록수'가 생각났다.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을 어떻게든 재미있게 설명하고자 열강을 했다. 꼬맹이들은 열심히 노트를 했다. 할머니들도 조그만 칠판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들은 한국을 알고싶어 했다. 120여 민족이 살고 있는 이나라에서 그들은 고려인들끼리의 결혼을 억척스럽게 고집부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잊혀진 한글과 잊혀져가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들의 모습은 이 지구에서결코 떠돌이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이모부는 그저께 대사관에서 가져온 화보들을 나누어 주었다. 한국 소식은 자주 들었음직한데도 신기한 듯 화보를 들쳐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북한이 보여준 남한홍보물을 보고 이곳 사람들이 모여 울었다고 한다. 거지들이 구걸하는사진들을 보고 남한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고 한다. 그러다 88올림픽때 남한이 정말 잘 사는구나하고 충격을 받았다고들 한다. 그들은 지금도 가난하지만 화보 속에서 우리가 겪은 홍수사태 사진을 발견하고선 다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져온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너무도 좋아한다. 좀 더 가져올걸.... 무언가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묻혀 고려문화원을 나섰다.

이제 새벽 두 시의 귀국 비행기를 두고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갔다. 시장에서만난 주씨 아주머니 댁이다. 동네분들이 모두 오신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이람. 정전이 되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여러 개의 촛불을 켜고 식사를 했다. 주씨 아주머니의 나물무침, 고기요리 솜씨가 어스름에 빛을 바랠까봐서인지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차를 들면서 옛날 얘기가 나온다.

"우리 할아비는 너무 불쌍했지비." 까레이스키. 이들은 1937년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곳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 이주된 우리 민족이다. 먹을 것, 입을 것하나 없이 기찻길에 내버려진 것이다. 몇 년 전 이곳의 옆 나라인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에 오신 70대 할아버지께서 그런 옛날을 회상하시면서 설움에 북받친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TV에서 보았었다. 그 찌든 한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생생하다. 사막에서, 황무지에서 바위에 잡초를 갈아먹고 버텨낸 가족들이다.

"아무일 없이 굶고, 맞고...." 구석 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어둠을 덮고 눈물을흘리신다. 어른거리는 촛불에 눈물이 비친다. 이들은 옛날 이야기에는 수시로눈물을 보인다고 한다. 나는 삭이지 못할 한이란 걸 보고 있는 것이다.

"자, 노래 한 번 해 봅세."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한 아주머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노래를 권유한다.

"고려창가 한 번 불러, 왜 그래." 옆 아주머니가 권유에 못이겨 고려창가를 시작했다.

"앞에는 압록강, 뒤에는 시베리아, 봄날 맞은 고향엔 언제나 가보나...." 촛불속에서 더욱 애절이 들리는 한 구절 한 구절이다. 그리고 연이어 `노들강변',`천안 삼거리'도 흘러 나온다. 박수에 다시 웃음이 나온다. 흥겨움을 오래하지못하게 하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다음에 올 때는 꼭 `심청전'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아쉬움 속에 자리를 일어섰다.

짐을 챙겨 자정 무렵에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무언지 마음 한 구석이 챙겨지지 않은 듯하다.

이모 이모부, 문왈레리 아저씨의 손짓을 보며 공항문을 들어섰다. 부디 모두행복하시길.... 비행기 트랩을 올라서면서 다짐한다. 사탕하나 더 사 줄 수 있도록 하나 더 뛸 것이다.<끝>

 입력: 1998.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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