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홀/살짝 펼친 일기장

《논픽션》… 우즈벡 7일 기행 <상>

vincent7 2012. 5. 22. 15:15

 

 

1998년 11월 27일~12월 4일 : 국제신문 연재

                                                                           

 

《논픽션》… 우즈벡 7일 기행 <상> / 주대봉

`31.7kg'. 승규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마주보며 웃었다. 항공사 직원이 방금32kg까지 허용된다는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의기양양하게 둘은 수속을 마치고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비행기에 자리를 잡았다. 순조로운 출발 속에 들뜬 가슴을 가라앉힐려는 듯 비행기는 30분이 지나서야 이륙을 했다.

"커피, 콜라?" 비디오에서 많이 본 얼굴을 한, 서양 여자가 말을 건넨다.

"아.... 디스...." 나는 스튜어디스 앞에 놓인 이동식 바의 한 곳을 손가락질했다.

"아, 댕큐." 냉수를 받아 한 입 들이키자 목이 칵하고 달아오른다.

"아이고....임마, 보드카 아이가." 무역업을 하면서 해외여행을 자주 한 승규가 가만히 지켜본 효과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듯 연신 웃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나는 지난 몇 달 사이에 이 나라에 대해서 박사가 된 느낌이다. 남북한을합한 면적의 두 배, 인구 2300만명, 92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중앙아시아의초원국가. 그곳에 이모는 선교사, 이모부는 의료봉사활동으로 가 계신지도 벌써 3년째이다. 석달 전 두 분께서 잠시 부산에 왔었다. 집에 며칠 머물면서 힘들어진 조국의 모습에 안타까운 심정을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전부터 편지로 하신 말씀을 던지셨다.

"그 나라는 자원은 풍부하지만 실장갑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인데...." "이모, 이젠 그 쪽으로 뛰어볼 겁니다." "그래, 좀 더 젊을 때 좀 더 넓게 볼수 있어야지."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계속 무역을 하고 있던 이 친구와 나는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이제 현지 시장조사를 하러가는 것이다. 차비를 아끼고자 이모부가 말하신 물건들을 보따리에 꽉꽉 채워넣었다. 그런데 웃고 있는 우리 머리 속은 보따리물건만큼 `프론티어 정신'이라 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마음 속은 기대와불안이 섞여 혼돈스럽게 채워진 것 같았다.

"야, 한 수 할까." "좋지." 우리는 챙겨온 휴대용 바둑판을 펼쳤다. 우리는 바둑돌로 마음을 감췄고 몇 몇 한국인 승객들도 7시간의 지루함을 달래려는 듯모여들어 어느덧 훈수까지 한다.

드디어 도착이다. 낮 2시에 출발한 비행기가 10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직 어스름녁이다. 아, 4시간 시차가 있지. 비행기는 허름한 건물 앞에 섰다. 설마했더니 깨어진 유리창이 보이는 그 건물이 공항건물이었다. 어쨌든 도착했다.

"자, 내리자." "슬슬 시작해볼까." 승규와 나는 숨을 들이키고는 짐을 챙겼다.

수속을 밟고 있는 중에 유리문 밖에서 손을 흔들고 계신 이모, 이모부 모습이보였다. 우리도 얼른 손을 흔들었다. 이산가족 상봉의 중계방송 그 자체이다.

그런데 순조로운 수속에 문제가 생겼다. 승규의 입국서류를 검색하던 공항직원이 사인을 반쯤 하다가 그냥 화장실로 가 버린 것이다. 30분 가량 기다려 겨우공항건물을 나왔다.

"어이구 돈 때문에 그러는거야." "그냥 10불 줘 버려야 하는데...." "안돼, 버릇을 고쳐야지." 이모, 이모부는 사회주의 잔재에 대한 토론까지 하신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겨우 싣고 그 나라 수도인 타쉬켄트의 어둠을 빠져 1시간 반만에 두 분이 사는 가잘켄트에 도착했다.

이모집에 짐을 대충 풀고 아까 운전을 해 준 문 왈레리씨 집에 갔다. 옆집 아저씨같은 편한 인상의 왈레리씨와 연신 웃고만 계신 슈퍼헤비급의 아주머니.

무척 자상하신 분들이었다. 식탁도 아주머니 덩치만큼 풍성하게 차려놓으셨다.

"어, 김치네." "야, 고추에다가 된장, 깍두기...." 승규와 나는 신기한 듯 예상 밖의 식탁메뉴에 한 마디씩 하지않을 수 없었다.

"마음에 드우, 잡셔 봅세." 아주머니는 우리 표정에 더욱 기분이 좋아지신 듯웃으며 말을 건넨다. 그렇다. 나는 사업생각만 골똘히 하느라 이곳에 우리 고려인이 23만명이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강한 함경도 사투리사실 북한 사투리 중에서 그게 함경도 사투리인건 나중에알았다와 김치 속에서 나는 다른 걸 다시 잊어버렸다. 중앙아시아의 한 외국에온 사실을.

"어따, 배 부릅니다. 잘 먹었습니다." 편안한 마음에 시차적응도 아랑곳없이포식을 했다.

"아직 아닙메. `디나' 좀 들기우." "또 먹습니까?" 아주머니는 우즈벡에서만나는 과일인 수박만한 참외인 `디나'라는 과일을 내 놓으셨다. 우리는 성의를무시할 수 없어 억지로 뱃속에 이겨넣었다.

"이것도 듭세." "또, 고맙습니다." 아까부터 식탁에 놓여있던 사탕을 주신다.

이곳 사람들은 식후에 사탕을 먹는다고 한다. 이상하지만 또 먹었다.

"자, 차이도 들어야지비." `차이'는 차를 말한다. 둥글레차와 비슷한 이 `차이'를 이야기 속에 넉 잔이나 마셨다. 이젠 진짜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나는 아주머니 체급의 원인을 알 것만 같았다.

"한국 사람들 먹기 급하지비, 우리는 전부 이렇게 먹는다우, 모두 두시간 걸려서 먹음세." 아주머니의 말씀에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떠오른다.

`여유'. 그래 우리는 바삐 살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있구나. 그건우리 나라 60년대 말의 경제 수준인 이곳에 남아 있는 소중한 것이었다. 이모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밤하늘은 온통 별로 뒤덮여 있었다. 평생 도시에서 지낸나는 고개들 여유가 없어 별을 못봤던 것일까. 별이 없었던 것일까....둘째날은 이모가 세워놓은 스케줄에 따라 하루만 관광을 하기로 했다. 이모, 이모부는 우리 때문에 웬만한 일은 다 미룬 듯 했다. 넷이서 가잘켄트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신간이란 곳으로 향했다. 잘 닦여진 아스팔트 위로 양떼와 소떼가수시로 지나간다. 하지만 이모부는 경적을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짐승들이 놀랄까봐 모두 기다렸다가 간다고 한다. 끝없는 초원을 지나산등성이로 올라서니 너무도 큰 댐과 저수지가 보였다. 비행기 안에 비치된 관광 팸플릿에서 본 그 댐이었다.

"이 댐이 무너지면 가잘켄트, 수도인 타쉬켄트도 다 물에 잠겨 버려. 굉장하지." 이모부 말대로 굉장히 큰 규모였다. 그런데 나는 자꾸 아까 들녁 개울에서 낚시질을 하던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르는 강물 위에'란 영화가 연상된 까닭일까. 넓은 호수를 끼고 시원한 드라이브를 했다. 산 위에는 녹지않은눈이 쌓여있었다.

이 나라는 평지가 해발 700m, 저 산은 해발 1800m라니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은 산이었다.

"들꽃이 너무 많았는데...." 이모는 봄에 본 들꽃의 무성함을 보여주지 못해안타까워 하셨다. 하지만 승규는 전에 가봤던 알프스보다 더 멋있다고 하면서감탄을 금치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당나귀에 짐을 가득 얹고 그 위에 올라탄할아버지를 보았다. 어찌 보면 당나귀가 불쌍하고 어찌보면 할아버지가 멋있고...."저기가 이번에 만든 공장들이야." 이모부는 굴뚝 연기가 나는 공장들을가리켰다. "저기는 짓다가 그만 둔 콘도 건물이야." 경치좋은 자리에 큰 건물들이 공사중단으로 흉물처럼 듬성듬성 서 있었다.

"이모부, 개발을 하지 않는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그래, 우리 나라는 개발을 해서 자연을 다 망쳐놨지." 이모도 거든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이 정도 경관이라면 골프장에, 놀이공원에, 다 파헤쳐 놨을거야." "야, 저 놈 봐라." 갑자기 승규가 창 밖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여섯살쯤 되어보이는 녀석이 맨발에 가지채 하나 부여잡고 소 너댓마리를 몰아가고있었다.

셋째날, 이제 비지니스 본연의 업무를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 먼저 재래시장을둘러 보기로 했다. `바자르'라고 불리는 재래시장은 그야말로 우리 60년대말의재래시장 그대로인 듯했다. 두 분의 안내로 그 마을 재래시장에 들어서니 의외로 고려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트라스트 비이체." "안녕하십니까." 이모, 이모부를 잘 아는 듯한 사람들이우리에게 러시아어, 한국어 각각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김치를 파는 아주머니는 이모가 같은 성씨를 지닌 주가라고 나를 소개하자 쑥스러움 속에 무척 반가워 하셨다.

"까레야에서 왔소?" "예." "아이고, 반갑고마, 어째, 여긴 좋수?" "예, 너무좋은데요." "그래. 편히 있다 갑수." 이모는 주씨 아주머니께서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했다. 바자르는 과일이 많이 널려져 있었고 생필품은 궁색해 보이는 중국제가 대부분이었다.

번잡한 재래시장을 빠져나와 문왈레리 아저씨의 안내로 타쉬켄트로 향했다. 현지 고려인, 즉 까레이스키로서 회사를 운영중인 안사장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작 그 분은 우리말에 서툴렀다. 그래도 다행히 왈레리 아저씨의통역으로 사업적인 얘기를 충분히 나눌 수 있었다. 이곳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영향을 받아 어려움이 커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몇 가지 일을 성사시킬 가능성을 만들었다. 긴장 속에서 겨우 만든 안도의 부분이다.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어와 자국어인 우즈벡어를 쓴다. 승규와 나는 고려인,까레이스키 속에서 언어의 불편함을 모르다가 오늘 비로소 수도인 타쉬켄트에서 외국이라는 맛을 언어로 느낄 수 있었다. "스파시바(감사합니다)." "다스비다니야(안녕히 계십시오)." 어줍잖게 익힌 몇 마디 러시아어로 인사를 하곤 그회사를 나섰다. 수도인 타쉬켄트는 나름대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나치는 자동차 중에서 새차이구나 싶은 것은 모두 대우자동차였다. 그리고 삼성간판.... 우리는 괜스리 미소를 머금었다. 이모는 고국이 살기 힘든 때에 큰홍수까지 난 뉴스를 여러 번 들었다며 걱정하고 계셨다. <계속>

 입력: 1998.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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