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색깔로 표현하면 초록이다. 초록도 하늘을 가려버린 성하(盛夏)의 진초록이 아니라 빛이 투과할 것 같은 연하디 연한 새초록이다. 요즘은 따사로운 햇살 한 줌, 한 가닥 빗줄기도 숲에 떨어지자마자 모두 엽록소로 변하는지, 움을 틔운 모든 생명들이 제각각 다른 초록으로 빛나고 있다. 자, 온갖 쪽물로 일렁이는 산을 한번 보자. 지금 숲에선 초록이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초록을 만나러 계룡산에 갔다. 갑사다.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 하여 봄엔 마곡사가 좋고, 가을엔 갑사가 낫다고 했지만 신록만 본다면 봄에도 갑사가 더 낫다. 기품 있는 마곡사 숲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은 울울창창한 마곡사 백련암 솔숲 길을 먼저 찾았다.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운치 있는 오솔길. 무릎을 탁 칠 정도로 훌륭했다. 한데, 마곡사는 침엽수림이 주종이었다. 반면 갑사는 활엽수림으로 덮여있다. 신록은 침엽수림보다 활엽수림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갑사로 가는 길. 계룡저수지를 접고 들어가면 울창한 고목 숲이다. 갑사를 처음 찾는 사람은 은성(殷盛)한 숲에 놀란다. 비록 진입로 초입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깔았지만 아름드리 거목들이 도열해있다. 느티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벚나무, 풍계나무, 쉬나무, 말채나무, 단풍나무…. 크고 작은 이파리들이 하늘을 가렸다. 자세히 보면 잎의 크기와 두께, 빛이 스며드는 정도에 따라 초록의 농담이 다르다. 때론 단풍잎처럼 불그레한 신록도 있으며, 노란빛을 띠기도 한다. 그래서 산림학자 이유미 박사는 신록도 단풍만큼 곱고 화려하다고 했다. 이런 활엽수림이 갑사를 품고 있다. 어디 절뿐이겠는가? 숲은 사람도 품어준다. 그래서 갑사에 가면 산에 오른다기보다 산에 든다는 느낌이 든다.
갑사는 백제 때인 420년 세워졌다. 1,600년이 조금 못된 역사를 지닌 늙은 절이다. 한데 중창불사로 당우들이 많이 들어선 데다 일부는 공사중이라 어수선해서 고찰의 위엄은 조금 떨어진다. 그래도 갑사는 독특하다. 갑사에는 절을 창건할 당시 세웠다는 공우탑, 요사채 담장을 뚫어 만든 통로, 권세가의 별장이었다는 찻집 등 요리조리 눈길 줄 곳이 많다.
공우탑(功牛塔)이라…. 암자를 지을 때 짐을 나르던 소가 냇물에서 기절해 죽자 소의 공을 치하해서 세웠다는 탑이다. 아마도 그때 절을 짓던 승려는 행여 부처가 소로 화(化)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찻집은 구한말 윤덕영의 별장. 후에 국회의원 박충식씨가 별장으로 쓰다가 97년부터 전통찻집이 됐다. 탑 하나, 건물 한 동에도 역사가 있다.
갑사에서 동학사로 넘어가는 길은 수필 ‘갑사로 가는 길’의 소재가 됐던 그 길이다. 용문폭포를 지나 금잔디 고갯마루에는 오뉘탑이 있다. 오뉘탑을 지나 동학사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는데 가는 길 내내 신록 숲을 지나치게 된다.
온갖 새초록이 뒤덮고 있는 갑사 숲. 나무등걸에 앉아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양하의 ‘신록예찬’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23년전 수험생 시절, 국어시험에 단골로 나오던 이 구절을 줄줄 외워댔지만 교실에만 갇혀있던 당시엔 초록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진 못했다. 초록이 내 몸의 모든 숨구멍을 이렇게 활짝 열어놓을 줄 그땐 몰랐다. 초록은 생명이다.
▶여행길잡이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정안IC 톨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우회전해 고가도로를 타면 23번 국도. 갑사 이정표를 보고 내려서서 읍내에서 좌회전(표지판 있음)하면 계룡저수지를 끼고 갑사로 가는 길이다. 이정표가 잘 돼 있다. 갑사 입장료는 어른 3,200원, 어린이 600원. 주차료 4,000원. 호남권에서는 호남고속도로~유성IC~32번 국도~마티터널~청벽교차로~갑사 코스를 이용한다. 갑사(041-857-8981). 계룡산관리사무소 갑사분소(041-857-5178). 갑사 입구에 청수장(041-857-5181), 녹수장(041-857-6312) 등 옛날 산장식 여관이 있다. 입구에는 산채백반집들이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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