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향기/산행교실-등산개요

산꾼 이야기

vincent7 2014. 2. 23. 23:05

 

[겨울 설악 특집| 골수 산꾼들 이야기] 젊은 날 등산의 올가미에 걸려 있던 산꾼들
    설악산 ‘등반 비사’ 속의 클라이머들 이야기

     

	울산암 종주. 왼쪽부터 울산암에서 수정을 발견해 횡재한 김진원(보우AC, 1985년 남극 빈슨매시프 원정대원), 필자, 고윤석(중앙대 OB).
▲ 울산암 종주. 왼쪽부터 울산암에서 수정을 발견해 횡재한 김진원(보우AC, 1985년 남극 빈슨매시프 원정대원), 필자, 고윤석(중앙대 OB).

산악인들에게 남한 최고의 명산을 뽑으라면 어느 산을 택할까. 그건 두 말할 나위 없이 단연 설악산을 으뜸으로 꼽을 것이다.

광복 이전만 해도 설악산은 금강산의 그늘에 가리어 산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백두대간의 준령 깊숙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은자(隱者)의 산이었다.

다듬어진 경관이 금강산이라면 설악산은 자연 그대로의 감추어진 경관을 지닌 산이며 금강산에 버금가는 화려함과 웅장함마저 모두 지니고 있는 산이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朝鮮의 山水>(1947년 동명사)에서 두 산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금강산은 너무나 제 모습을 모두 드러내어 마치 주막집 색시같이 아무에게나 손을 내미는 모습이지만, 설악산은 절세미인이 그윽한 계곡 속에 숨어 수줍은 듯이 손짓하는 여인의 모습과 같다’고 두 산을 비교했다.

남한 제일의 절경과 등반성 고루 갖춘 설악산

설악산은 한국 전쟁 이후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설악산이 수복된 것은 1953년이다. 이후 남한에 편입되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1971년 영동고속도로와 설악산 산업관광도로가 개통되면서 등산의 대중화시대가 개막된다. 특히 영서와 영동의 분수령을 이룬 한계령이 뚫리면서 양양까지 120km의 거리가 46km로 단축되어 한계령, 오색, 장수대를 기점으로 하는 등산로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등산 붐이 일어나면서 설악산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남한 제일의 절경과 등반성 모두를 갖춘 명산으로서의 왕좌를 굳힌다.

설악산은 험준한 암봉과 암릉이 골격을 이루고 있어 암벽등반 대상지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한반도 최대의 폭포인 토왕성폭, 대승폭, 소승폭, 그밖에 실폭, 갱기폭, 형제폭, 백미폭 등 난이도 높은 폭포들이 수없이 걸려 있어 겨울철이면 수준 높은 빙벽등반 대상지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최대를 자랑하는 울산암, 장군봉, 적벽, 유선대, 범봉, 장군석봉 이외도 암릉등반 대상지인 천화대, 흑범길, 석주길, 염라길, 칠형제봉 리지, 몽유도원도, 봉화대 리지, 죽순봉 리지, 적십자길, 삼형제길, 노적봉 리지, 용아장성릉, 남설악전망대 리지, 오색 만경대리지, 울산바위 리지 등 수많은 등반대상지가 산재해 있는 한국 알피니즘의 심장부가 되는 산이다.

지금은 설악산까지 포장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접근이 용이하지만, 등반가들이 찾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설악산까지의 접근은 편도 7~8시간이 걸렸다.

서울 마장동에서 출발한 시외버스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인제와 원통을 경유해 진부령을 넘어 속초로 갔다. 당시 원통~용대리는 일방통행 구간이었고, 한계령과 미시령은 군사도로로 일반 차량이 통제되던 시절이었으니 당시를 회상해 보면 격세지감이 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속초까지 운행하던 금강여객 버스에는 안내양이 동승하던 시대였으며, 당시 설악산을 찾는다는 것은 지금의 해외원정보다 더 어려웠다.

그렇게 찾아가기 어려웠던 설악산은 알피니즘을 꿈꾸는 많은 클라이머들에게 훈련의 장이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고, 그래서 그 산 안에는 전설 같은 얘깃거리도 많이 생겨났다.

추락이 가져온 횡재, 천연 자수정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쟁이들은 장비 욕심이 대단하다. 등산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1960~1970년대는 더욱 그랬다. 장비를 소중하게 다루고 아끼는 것이 산쟁이들에겐 계율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어쩌다 모르고 자일을 밟거나 깔고 않으면 엉덩이에서 불이 날 정도로 선배로부터 얼차려를 받았다.


	1 설악산 귀때기골 입구. 왼쪽부터 울산암에서 현금 뭉치가 든 배낭을 분실했던 최성수(하켄클럽, 전 RF 대표, 1984년 자누 북벽 원정대원), 홍석하(월간 사람과 산 대표), 필자, 김성주(보우AC, 재미 산악인). / 2 1980 년 하프돔. 생스 갓 레지를 등반하는 강구영. / 3 1981년 드류 서벽을 등반 중인 허정식. / 4 1985년 남극 빈슨매시프를 등정하고 BC에 내려선 허욱.
▲ 1 설악산 귀때기골 입구. 왼쪽부터 울산암에서 현금 뭉치가 든 배낭을 분실했던 최성수(하켄클럽, 전 RF 대표, 1984년 자누 북벽 원정대원), 홍석하(월간 사람과 산 대표), 필자, 김성주(보우AC, 재미 산악인). / 2 1980 년 하프돔. 생스 갓 레지를 등반하는 강구영. / 3 1981년 드류 서벽을 등반 중인 허정식. / 4 1985년 남극 빈슨매시프를 등정하고 BC에 내려선 허욱.

어느 해 여름 설악산 울산암으로 등반을 갔다. 선등자 김진원(남극 빈슨매시프 한국 초등반대 대원)이 리딩을 하면서 순조롭게 두 번째 마디를 끝내고 세 번째 마디의 오버행 턱을 넘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10여 m를 추락했다. 그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빙글빙글 회전하다가 멈춰 섰다.

아래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배 한 사람이 “야! 진원아 자일 상한 데 없니?”라고 소리쳐 추락자의 부상보다는 자일의 손상 여부부터 확인했다. 김진원은 “형, 사람보다 자일이 더 중합니까. 부상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요”라고 볼멘소리로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당시는 이처럼 장비를 자신의 분신이나 자식 이상으로 애지중지하던 시절이었다.

이날 김진원은 추락 지점에서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아 횡재했다. 그는 뒤집힌 자세로 전면의 바위 구멍을 바라본 순간 보랏빛 광채를 띤 천연 자수정을 발견했다. 자기 눈을 의심했다. 추락의 충격으로 인한 착시현상인가 의심하면서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그 바위 구멍 속에는 분명 어른 허벅지 굵기의 천연 자수정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삭마작용을 일으켜 속살을 드러낸 채 그를 기다려온 자수정과의 운명적인 해후였다. 추락의 노고를 보상하기 위해 울산바위 산신령이 그에게 큰 선물을 한 것이다.

이날 저녁 계조암 옆 캠프지로 돌아온 대원들은 뜻밖의 전리품을 놓고 분배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팀 전체의 소득이니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하자는 의견과 최초 발견자에 대한 선취특권을 인정하자는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었다. 결국 이 수정은 최초의 발견자에게 돌아갔다. 백수인 그는 장비 구입을 위해 당시 주공의 중견간부로 있던 선배 G씨의 손에 이 수정을 넘겼다.

그 후 그는 한국 남극 탐험대(대장 홍석하)의 일원으로 허욱(악우회), 이찬영(보우회, 사망), 허정식(은벽산악회), 권오환(하켄클럽)과 함께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에서 한국인 최초의 등정을 이룩했다.

퇴직금과 맞바꾼 히말라야 티켓

울산암에서 추락하면서 횡재를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금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의 이야기 또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1980년대 국산 등산화의 선두주자로 국내시장을 제패했던 레드페이스 CEO를 역임한 최성수. 그의 원래의 직업은 국세청에 적을 둔 세리(稅吏)였으나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기 위해 천직으로 삼았던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1984년 히말라야 자누(7,710m) 북벽(대장 김기혁 양정고 OB)을 향해 인생항로를 수정한다.



	설탕포대를 메고있는 신승모.
설탕포대를 메고있는 신승모.

The Impossible Dream / Giovanni Marradi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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