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향기/찻잔 속의 글

온유한 사람

vincent7 2012. 6. 26. 03:42

 

 

한 상담 책에서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제 아내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분노합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는데 제 아내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 사는 게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가 온유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발견했습니다.

특히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온유한 사람을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게 조급하게 초조해 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타락한 인간의 특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성경은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라우테스', 히브리어는 '아나브'입니다.

이 단어들은 명백하게 '겸손' 또는 '온유'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온유와 겸손이 같은 심상에서 나온 이웃사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래적으로 조금 더 온유한 것 같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란 그저 성품이 유한 그런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키워드는 의지입니다.

 

온유란 자신의 뜻을, 자신의 의지로 내려놓고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여 사양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내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뜻을 헤아려 그것으로 내 행동을 결정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누군가 나를 생각해 주고 내 생각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기 모순의 존재입니다.

영성이란 내 속에서 그런 자기모순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이끌릴 수 있는 성품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우리에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온유를 생각한다면 온유는 하느님과 관련하여 더더욱 의미있는 태도와 성품입니다.

다시 말해 온유란 하느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그분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의 태도는 창조와 관련하여 가장 본래적이며 이상적인 태도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교통하는 존재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대로 따를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나브'가 모세의 성품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람보다 모세가 온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성경은 모세가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가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모세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백성들에게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선 자기 주장이나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입장만을 대변했습니다.

결국 그의 삶은 자기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언제나 하느님과 백성들의 뜻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성경이 모세를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온유한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런 하느님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이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말도 그러한 맥락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좀더 풍성한 말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능력은 온유에 정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땅이란 총체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땅을 받았다는 것은 리더십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터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들의 뜻을 분변하여 따르는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그의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결국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는 아브라함의 복을 실현하는 믿음의 자손으로서의 역할을

온유한 사람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마11:29)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삶 전체가 철두철미하게 아버지를 향해 초점이 맞추어진 삶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모든 행동, 그분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모두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당신을 믿지 말라고까지(요10:37)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영원한 우리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을 닮아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온유함을 우리는 자연 속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케나다 퀘벡에는 긴 산맥이 있습니다.

이 산맥은 동쪽과 서쪽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서쪽에는 여러 나무들이 울창한 반면 동쪽에는 오직 히말라야삼목만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기이한 경관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수수께끼였습니다.

이 태고의 수수께끼는 한 부부에 의해 풀렸습니다.

 

1983년 어느 겨울날, 결혼 생활이 위태로운 부부는 사랑을 회복하기위해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여행을 통해서도 변화가 없으면 과감히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일종의 이별 여행이었던 셈입니다.

두 사람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큰 눈이 내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내가 놀란 듯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왜 동쪽에는 히말라야삼목 외에는 살 수 없었는지."

"동쪽의 히말라야삼목은 적당히 휘어지기 때문이에요.

동쪽은 눈이 많이 오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휘어질 줄 모르는 나무는 결국 부러지거나 꺾여서 죽고 말았던 거예요.

서쪽은 당연히 눈이 적고 바람이 많이 불지 않으니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살 수 있었던 거구요."

 

아내의 말을 들은 남편은 아내에게 다가가 아내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히말라야삼목이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히말라야 삼목이 그 부부에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온유함입니다.

그 부부의 깨달음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극복하고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공급하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