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바람
-박인과(朴仁果)
들풀은 어느 서러운 길 위에 앉아
강물에 뿌리를 적시며 울었네
장미꽃의 푸른 가시에 찔리고
시리도록 말발굽에 짓밟히던 풀의 마음...
초록빛의 맑은 피 뚝 뚝 흘리며
붉게붉게 노을이 번지는 먼 하늘에 풀마을에
흔들리는 들풀을 나는 보았네
아, 다 헛된 것을
생의 문 밖 어디에선가 미칠 듯
청이슬 꿰어오는 실뱀의 울음에 창을 열고
들에 서면 한 줄기 풀바람 소리 였던 것을
허허벌판에
풀풀 날리는 풀잎은
풀잎을 흔드는 풀바람에
날려가 버리면 잡을 수 없는 풀꿈 이었던 것을
풀잎들 풀풀거리던 날
찢어지며 훗날도 울지 못할 날
세월이 흐르고 말면 그만인 것을
아픈 풀잎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수수깡 수수꽃다리 풀잎은
하늘하늘 제 풀에 풀어져 풀바람에
풀마을에 흩어지고 말면 그만인 것을
풀잎들이 제 아무리 안 풀리는 허공에 몸풀림을 해봐도
풀바람이 불어오면 풀잎은 어쩔 수 없는 것을
아, 헛된 것을
참대숲에서 들이마시는 이 한 모금
비애의 쓰린 술잔도 영영
넘칠 수 없는 눈물로 지금도 울고 있네 풀잎은
머언 풀강에 풀 물은 둥근 달 둥둥 떠
바다로 풀려가는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그 통쾌한 환상인줄 알면서도...
풀꽃이 하얗게 일어서는 머지 않은 훗날
풀안개 속에 영원히 눈을 감으면
내가 죽은 무덤가의 풀들은 무성해져
풀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을 것을
뿌리를 내려라 하얀 뿌리를 내려라
들풀아 하얀 너의 뿌리를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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