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향기/주머니속의 애송시

비오는 날에 -나희덕 (1966~ )

vincent7 2010. 8. 10. 01:33

비오는 날에

-나희덕 (1966~ )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 줄 수도 있는

이 비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