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향기/주머니속의 애송시

오후... 유안진

vincent7 2018. 3. 19. 11:06







그림/천경자




        * 오후 / 유안진

        천천히
        담담하게
        조용히
        객쩍고 미안하게 ……
        이런 말들과 더 어울리는 오후(午後)
        그래서 오후가 더 길다
        그런 오후를 살고 있다 나는

        지는 해가
        더 처절하고
        더 장엄하고
        더 할말 많고
        더 고독하지만
        그래서 동치미 국물보다 깊고 깊은 맛이여
        그런 오후를 살고 싶다 나는.





      * 오후를 견디는 법 / 오명선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 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글의 향기 > 주머니속의 애송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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