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잠이다 언젠가 남해 금산에 간 적이 있다. 금산에 가기 위해 챙겨둔 이유들은 많았지만, 그때의 이유는 난데없게도, 금산 꼭대기 보리암 옆에 있다는 여숙에서 너르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다 스르르 근심 없는 잠에 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라선 밤기차를 타고 새벽녘에 하동에서 내려 푸르스름한 새벽 안개 같은 재첩국을 한 사발 마시고, 버스를 갈아타며 내처 달려간 금산에서, 결국 난 잠들지 못했다. 삶의 피곤과 허망이 따라오지 못하는 잠, 평화로운 혼절 같은 잠을 원했지만, 예의 어지럽고 아픈 잠이 될 것 같다는 예감, 금산이 완강하게 밀쳐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금산은 질문하고 곧추세우고 용맹 정진하게 하는 산이지, 나그네의 피폐를 말없이 품어 주는 산은 아니었던 것이다. 야단법석(野壇法席) 같은 마음을 달래며 쫓기듯 내려와, 금산 아래 정오 무렵의 국도 변에서 몇 시간을 막막하게 정처 없어 하던 기억이 통증처럼 새롭다.
여수 돌산도 남쪽 끝, 큰 바다거북 형상의 금오산 등짝에는 낙산사의 홍연암, 강화도의 보문암, 금산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관음 도량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향일암이 있다. 향일암 관음전에서 바라보이는 짙푸른 다도해의 풍광은 마치 생시에 꾸는 꿈처럼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거북 형상의 금오산과 향일암과 바다가 어울려 엮어내는 지극한 상징성이다. 향일암 일대의 바위들은 온통 거북 등처럼 갈라진 줄무늬들을 갖고 있는데, 신성에 굶주린 사람들은 예로부터 그것을 돌에 새겨진 불경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면 향일암 일대의 지세는, 큰 거북이 한 마리가 등에 불경 꾸러미를 지고 두 팔을 휘저으며 바다로 들어가려다 멈춰선 형국이 된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기 전에는 바다로 갈 수 없다는 듯이, 끝끝내 그 진땀들, 그 눈물들과 함께 하겠다는 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온 세상이 화엄 천지가 되는 날, 등짝에 짊어지고 있던 불경들 후둑후둑 털어 내고 홀가분하게 바다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이 지세의 종교적 상징성을 맨 처음 알아본 이는, 신라시대의 눈 밝은 고승 원효였다. 그는 선덕여왕 통치 13년인 644년에 이곳 금오산의 불경 더미 한가운데에 원통암(향일암)을 세웠다.(며칠전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안타깝다)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향일암 아래 임포마을에서 깨어난 아침, 이부자리 위에 부스스한 얼굴로 앉아 지척의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기이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지친 몸과 그보다 더 지친 마음으로 달려간 금산에서 자지 못했던 잠을 그제야 비로소 잤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잠은 느지막이 채비를 하고 올라간 향일암에까지 따라왔다. 관세음보살 상 옆의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자니, 망망한 대해에는 아침볕이 자욱하고, 관음전 안의 비구니는 쉴새없이 절을 하고 있는데, 깜빡깜빡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다. 여수는 우선 내게, 아늑하고 평정한 잠이었고, 그 잠으로의 따뜻한 유혹이었다.
여수는 물이다 ‘여수’라는 말을 가만히 되뇌어보면, 잔잔히 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고즈넉하게 흘러가는 물소리 같기도, 말갛게 가라앉은 슬픔의 소리 같기도 하다. 이 땅에 ‘여수(麗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고려 때라는데, 이 이름을 선사한 어느 고려인은 이곳 바다의 아름다움에 깊이 탄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여수는 땅의 이름이 아니라 물의 이름이다. ‘아름다운 물’ 아닌가. 조금 양보하자면, 물에 압도당한 땅의 이름이다.
과연, 여수는 여수 반도를 포함해 장군도, 거문도, 백도, 금오도, 안도, 사도, 초도, 손죽도, 연도 등 바다의 꽃밭 같은 316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수많은 항구들로 이루어진 물의 고장이다. 이 수국(水國)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피자면, 여수에 살아도 아마 오래 살아야 하리라. 그런데 7천여 척의 어선들이 수시로 들고 나며, 굴이나 김, 미역 따위를 기르는 양식장이 텃밭처럼 널려 있는 그 물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완상하는 물을 넘어, 인간의 노동과 인간의 삶 안으로 깊숙이 귀순한 물이다. 그래서 여수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불쑥불쑥 바다가 뭍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수는 맵다 여수하면 사람들은 으레 한려수도나 돌산대교, 또는 동백을 떠올리지만, 근자에 이르러 사람들의 연상망을 틀어쥔 또하나의 명물이 등장했는데, 다름 아닌 돌산 갓김치다. 갓김치를 처음 먹어 보는 사람은, 입에 넣자마자 깜짝 놀라게 된다. 특유의 향은 둘째치고 우선 그 톡 쏘는 매운 맛 때문이다. 그 맛은 고추처럼 매운 맛이 아니라, 겨자처럼 매운 맛이다. 온갖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웬만한 맛에는 꿈쩍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갓김치를 씹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슬며시 입맛이 돈다.
여수에 머무는 며칠 동안, 횟집에 가든 밥집에 가든, 갓김치는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상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 맛은, 우리의 김치 맛이 대개 그러하듯, 주인의 나이나 취향에 따라 각기 달랐다. 담근 지 며칠 안 된 것은 씹히는 맛과 매운 맛이 강했고, 담근 지 오래된 것일수록 매운 맛이 흐리고 연했으며, 거의 매운 맛이 가신 것도 있었다. 그리고 토종 적색 갓으로 만든 물김치도 있었는데, 보라색 안료를 개어 놓은 듯 물이 고왔다. 그것은 우선 눈으로 먹으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 했다. 향과 매운 맛이 너무 강해서 적어도 이레는 삭혀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는 토종 적색 갓은, 지금에 와서는 물김치를 담그는 데에나 조금 쓰일 뿐 거의 사라져 버렸고, 현재는 외래종인 청색 갓으로 주로 갓김치를 담근다고 했다. 팍 곰삭아 군내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토종 적색 갓김치를 맛보지 못한 것이 적잖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데 왜 돌산 갓김치일까? 갓이 유독 돌산에서만 나는 것도 아니고, 진작부터 알려지기로는 해남이나 통영의 갓이 더 먼저인데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겨울에도 온화한 기후, 무엇보다도 돌산의 비옥한 토양과 해풍 덕이 클 것이다. 그래서인지 돌산 갓의 씨앗을 육지의 다른 고장에 파종해도 그 원래의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돌산 농협 갓김치 공장에서는, 이 지역에서 나는 마늘, 파 등속의 양념과 싱싱한 새우로 만든 액젓을 그 맛의 원인으로 꼽았다. 처음 갓김치 공장을 세울 때는 ‘그 매운 것을 누가 먹겠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의 일촌일품(一村一品) 운동에 힘입어 밀어붙였는데, 의외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보리밭이나 고구마 밭을 밀어내고 갓밭이 돌산에 빼곡이 들어차게 되었다고 한다.
향일암에서 나오다, 그 갓밭에서 일하고 있는 시골 아낙 둘을 만났다. 야트막한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벗하며 사는 두 아낙은 언뜻 보기에 자매처럼 다정해 보였는데, 자기네 갓은 따로 물도 안 주고 약도 안 치기 때문에 ‘인물’은 없지만 맛은 좋다고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다가, 돌산 갓이 하도 유명해지니까 외지 사람들이 돌산 갓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는 갓단 묶는 끈을 다발로 사다가 자기네들 갓을 묶어 내다 파는 바람에 돌산 갓 값이 많이 떨어졌다고 가벼운 푸념을 하기도 했다. 바다 벌이가 주이기 때문에 갓 농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이들의 노동은, 조용한 놀이처럼 침착하고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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