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향기/주머니속의 애송시
저무는 이 한 해에도...이해인
vincent7
2015. 12. 30. 21:29
- 저무는 이 한 해에도 / 이해인
- 노을빛으로 저물어 가는 이 한 해에도
제가 아직 살아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음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음을
들녘의 볏단처럼 엎디어 감사드립니다
- 날마다 새로이 태양이 떠오르듯
오늘은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제 마음의 하늘에 환히 떠오르시는 주님
12월만 남아 있는 한 장의 달력에서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시간의 소리들은 쓸쓸하면서도
그립고 애틋한 여운을 남깁니다
- 아쉬움과 후회의 눈물 속에
초조하고 불안하게 서성이기보다는
소중한 옛친구를 대하듯
담담하고 평화로운 미소로
떠나는 한 해와 악수하고 싶습니다
색동설빔처럼 곱고 화려했던
새해 첫날의 다짐과 결심들이
많은 부분 퇴색해 버렸음을 인정하며
부끄러운 제 모습을 돌아봅니다
- 청정한 삶을 지향하는 구도자이면서도
제 마음을 갈고 닦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허영과 교만과 욕심의 때가 낀
제 마음의 창문은 게을리 닦으면서
다른 이의 창문이 더럽다고 비난하며
가까이 가길 꺼려한 위선자였습니다
처음에 지녔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사랑에 대한 열망은
기도의 밑거름이 부족해
타오르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 침묵의 어둠 속에서
빛의 언어를 끌어내시는 생명의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선물로 주신
가족, 친지, 이웃들에게
밝고 부드러운 생명의 말보다는
칙칙하고 거친 죽음의 말을
더 많이 건네고도
제때에 용서를 청하기보다
변명하는 일에 더욱 바빴습니다
- 제가 말을 할 때마다, 주님
제 안에 고요히 머무시어
해야 할 말과 안 해야 할 말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고
남에 관한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소서
참된 사랑만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당신의 삶 자체로 보여 주신 주님
- 제 일상의 강기슭에
눈만 뜨면 조약돌처럼 널려 있는
사랑과 봉사의 기회들을 지나쳐 간
저의 나태함과 무관심을 용서하십시오
절절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암울한 시대" 탓을 남에게만 돌리고
자신을 의인인 양 착각한
저의 오만함을 용서하십시오
전적으로 투신하는 행동적인 사랑보다
앞뒤로 재어보는 관념적인 사랑에 빠져
상처받는 모험을 두려워했습니다
- 사랑하는 방법도 극히 선택적이며
편협한 옹졸함을 버리지 못한 채로
보편적인 인류애를
잘도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 다 나열하지 못한
저의 숨은 죄와 잘못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과 이웃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 제 작은 머리로는 다 헤아릴 수 없고
제 작은 그릇엔 다 담을 수 없는
무한대이며 무한량의 신이신 주님
한 해 동안 걸어온 순례의 길 위에서
동행자가 되어 준 제 이웃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고마움과 삶의 아름다움을
처음인 듯 새롭히는
소나무빛 송년이 되게 하소서
- 저무는 이 한 해에도
솔잎처럼 푸르고 향기로운 희망 노래가
제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희망의 새해로 이어지게 하소서